우리를 가두는 언어의 감옥과 ‘통치성’에 대하여:”원래 다 그래”라는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우리를 가두는 언어의 감옥과 ‘통치성’에 대하여

언어 통치 구조

“원래 다 그래.”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당신의 입가에, 혹은 당신의 머릿속에 이 말이 맴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술자리에서, 직장 휴게실에서, 그리고 뉴스를 보며 가장 많이 내뱉는 말입니다. 이 말들은 마치 거대한 벽 앞에 선 인간이 내뱉는 한숨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한숨 섞인 말들이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매우 정교한 **‘언어적 장치’**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글은 위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일상 언어가 어떻게 우리를 ‘시민’에서 ‘생존자’로 전락시키는지, 그 서늘한 구조를 해부하는 비판적 보고서입니다.


1. 체념의 언어: 질문을 삭제하는 주문

우리는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너무나 쉽게 “원래 다 그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부당한 업무 지시를 받았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참사를 목격했을 때, 치솟는 물가와 불안한 고용 환경 앞에서 우리는 이 말을 방패처럼 꺼내 듭니다.

이 말의 기능은 명확합니다. **‘사유의 정지’**입니다. “원래 그렇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현상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물리 법칙처럼 둔갑합니다. 분명히 누군가가 설계했고, 누군가가 이득을 보고 있으며,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할 사회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원래”라는 단어는 그 인과관계를 단칼에 잘라버립니다.

한나 아렌트가 경고했던 ‘무사유(Thoughtlessness)’는 거창한 악행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다”며 질문을 멈추는 바로 그 순간, 악의 평범성은 우리 일상에 뿌리를 내립니다.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행위자(Agent)’**의 지위를 포기하고, 부조리한 구조를 몸으로 견뎌내는 **‘순응자(Subject)’**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념의 문제가 아니라, 부조리를 ‘적응’의 대상으로 번역해버리는 언어의 비극입니다.

2. 능력주의의 기만: 희망으로 포장된 가스라이팅

체념의 언어가 우리를 주저앉힌다면, 성공과 희망을 말하는 언어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 끊임없이 달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달리기 역시 건강하지 않습니다.

“집 한 채는 있어야지.” “투자는 필수야.” “운도 실력이야.”

이 말들은 겉보기에 개인의 성실함과 노력을 장려하는 격려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언어들의 이면에는 **‘구조의 은폐’**라는 무서운 기제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거주의 공간이 아닌 계급의 사다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노동 소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산 격차의 벽 앞에서, “투자는 필수”라는 말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명령어가 됩니다. 이 언어들은 사회가 해결해야 할 구조적 불평등(주거 불안, 소득 격차)을 개인의 ‘투자 능력’이나 ‘노력 부족’으로 치환해 버립니다.

성공은 ‘미담’이 되고 실패는 ‘개인의 결함’이 되는 사회. 여기서 사라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어떤 성공은 출발선부터 가능했고, 어떤 실패는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었는가?”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는 불공정한 경기장의 기울기를 ‘개인의 다리 근육’ 문제로 축소시킵니다. 우리는 이 언어에 속아 구조를 탓하는 대신, 못난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습니다.

3. 책임의 사유화: 피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구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 사회가 반응하는 언어를 살펴보십시오.

“네가 선택했잖아.” “못 버틴 네 탓이야.” “남 탓하지 마.”

이 말들은 겉보기에 성숙한 어른의 충고처럼 보입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원칙을 설파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 말들은 **‘선택지(Option)’**를 만든 권력의 존재를 완벽하게 지워버립니다.

비정규직을 선택하고 싶어서 선택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위험한 작업 현장을 선택하고 싶어서 선택한 청년이 어디 있습니까? 선택은 개인이 했지만, 그 선택지를 강요한 환경은 시스템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네가 선택했잖아”라는 말은 이 모든 맥락을 소거하고, 비극의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전가합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지점은, 우리 스스로가 이 말을 내면화하여 서로를 검열한다는 사실입니다. 직장에서 과로로 쓰러진 동료에게 “자기 관리를 못 해서 그렇다”고 말할 때, 시스템의 부조리에 저항하다 튕겨 나간 사람에게 “사회생활을 못 해서 그렇다”고 비난할 때, 우리는 의도치 않게 구조적 폭력의 공모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미셸 푸코가 말한 **‘통치성(Governmentality)’**의 완성입니다. 권력이 몽둥이를 들지 않아도, 시민들이 언어를 통해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상태 말입니다.

4. 냉소와 생존자: 시민의 죽음

이 모든 과정 끝에 남는 것은 차가운 냉소입니다.

“바꿔도 소용없어.” “정치는 다 똑같아.” “그냥 내 삶이나 잘 챙기자.”

이 말들은 쿨하고 똑똑한 현실 인식처럼 포장되지만, 실상은 **‘정치적 자살선언’**이나 다름없습니다. 냉소는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일지 모르나, 그 대가로 우리는 ‘공동체’를 잃습니다.

이 말이 반복될수록 우리 사회에서 ‘정치(Politics)’는 사라지고 ‘적응(Adaptation)’만 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민(Citizen)’**의 자격을 잃고 **‘생존자(Survivor)’**로 전락합니다. 시민은 공동의 안녕과 정의를 고민하며 구조를 바꾸려 연대하는 사람이지만, 생존자는 각자도생의 정글에서 나 하나 살아남기 위해 옆 사람을 밟거나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냉소가 짙어질수록 가장 행복해하는 것은 누구일까요? 바로 부조리한 구조를 유지하며 이득을 보는 기득권입니다. 구조는 질문받지 않을 때, 그리고 대중이 냉소에 빠져 각자의 삶으로 파편화될 때 가장 안전하게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5. 결론: 불편한 질문이 정치를 복원한다

“생각해 봐도 답이 없어.” “이게 현실이야.”

우리는 대화의 끝에서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하며 문을 닫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정말 답이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답을 찾는 과정을 우리가 너무 일찍 포기하도록 훈련받은 것일까요?

오늘 이 글의 목적은 명쾌한 해답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마음속에 ‘불편한 질문’ 하나를 심어드리는 것입니다.

앞으로 누군가, 혹은 여러분 자신이 “원래 다 그래”라고 말하려 할 때, 딱 한 번만 멈추고 이렇게 물어봐 주십시오.

“도대체 왜, 원래 그래야 합니까?” “이 ‘원래’라는 규칙은 누구에게 유리하게 설계된 것입니까?” “이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습니까?”

늘 하던 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부당하게 느껴지는 그 찰나의 낯설음. 우리의 정치는, 그리고 진정한 변화는 바로 거기서 시작됩니다. 언어의 감옥을 깨고 나와 질문을 던지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생존자가 아닌 시민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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